뉴니커! 간밤에 정말 마음고생 많았죠🦔
쏟아지는 뉴스 덕분에 비상계엄이 무엇인지, 현재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등은 이미 빠삭~~하게🍞 알고 계실 거예요. 굳이 같은 내용 반복해서 뉴니커 여러분들의 소중한 시간을 낭비시키지는 않을게요! '팜팜이와 함께하는 대한민국의 계엄' 시리즈에서 우리나라에 선포된 주요 비상계엄과 이를 둘러싼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하나씩 알아봐요.
1948년 10월 25일 (105일간) | 여수·순천사건 | 이승만 대통령
여수·순천사건(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부터 27일까지 전라남도 여수와 순천 지역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이에요. 당시 일부 군인들이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했고, 이를 정부가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는 아픔을 겪었어요.
참고로 '반란군'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용어라서 팜팜이는 '일부 군인'이라는 표현을 선택했어요. 최근에도 용어를 둘러싸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데요, 어떤 표현이 적절할지 뉴니커 여러분들이 판단해 보아요🧐
날짜를 보면 알겠지만 당시는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진 지 몇 주가 지나지 않았을 때로 사회가 매우 혼란스러웠어요.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8월 15일에 수립됐어요. 익숙한 날짜인가요? 네 맞아요! 광복 3주년 기념일에 맞춰서 정부 수립을 선포했죠.) 제주도에서는 4·3사건(역시 1948년에 발생)으로 인해 무장봉기가 발생했고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여수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를 파견하려 했어요. 하지만 이들 연대는 정부 명령을 거부했어요.
왜 거부했을까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아요:
- 지역적 연대감: 제주도는 행정적으로 전남에서 분리되었지만, 지역적 연대감은 여전히 강했어요. 이런 상황에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는 초토화 작전에 참여하는 것은 동향 사람들에게 총을 겨누는 행위로 받아들여졌죠.
- 좌익 세력의 내부 존재: 당시 급격한 병력 확충으로 인해 군 내부에는 좌익 경력을 가진 병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어요. 이들에겐 제주도 진압이 자신들이 속한 이념적 집단을 배신하는 행위로 여겨졌어요.
- 민간인 학살: 제주도 진압은 본래 무장 세력을 대상으로 했지만, 실제로는 민간인 초토화 작전으로 변질되었어요. 이런 작전에 참여하는 것은 군인들에게도 도덕적으로 큰 부담이 되었죠.
사건의 전개는 다음과 같아요:
-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 약 2,000명이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를 일으켰어요. (남로당 소속 군인이 부대를 지휘했지만 남로당 지휘 없이 독립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평가돼요.)
- 10월 20일~22일: 여수에서 시작된 세력은 순천으로 이동하며 범위를 확대했어요. 이 과정에서 친일파, 경찰, 우익인사를 처단했죠. (글이 전반적으로 선량한 무장 세력 vs 악랄한 진압군으로 흘러가서 마치 '무장 세력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로 들릴 수 있는데, 그건 확실히 아니라는 점을 밝힐게요. 여기서 보다시피 무장 세력도 잘못을 저지른 것은 맞아요.)
- 10월 21일: 정부는 여수와 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진압 작전을 시작했어요. (정확한 계엄령 선포 날짜가 자료마다 차이가 있어요. 대체로 21일에서 26일 사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당시는 계엄법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기였죠.)
- 10월 23일: 진압군이 순천을 탈환했어요.
- 10월 27일: 여수를 완전히 장악하며 반란을 진압했어요.
- 이듬해 2월: 계엄령이 해제되었어요.
진압군은 지역을 점령한 뒤 여순사건에 가담했던 부역자를 색출하기 위해 주민들을 공터에 소집했고, 현지 경찰이나 우익 인사들을 시켜 부역자였던 이들을 지목하게 했어요. 지목당하면? 법적인 절차 없이 즉석에서 처형되었어요. 지목한 손가락이 곧 총과 같아서 이 과정을 '손가락 총'이라고 불렀죠. 1949년 1월 13일 종산 국민학교에서 끌려온 125명의 아이들이 처형되기도 했는데, 전라남도가 집계한 인명 피해는 총 11,131명이에요.
여순사건 이후에도 대대적인 숙군(肅軍)이 진행되어 이승만 대통령에 반대하는 성향을 가진 군인들이 제거되었어요. 1948년 12월 1일에는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는데 내란 행위 자체보다는 반국가적 정당 단체의 활동을 방지하기 위해 내란과 유사한 목적을 가진 집단을 처벌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에요. 이는 행위 이전의 단계를 처벌하는 법인데, '불법적인 행위가 발생한 이후' 이를 처벌하는 형법과 상충되는 면이 있어 당시에도 논란이 많았어요.
인명 피해가 극심했음에도 유가족들은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이 찍혔기 때문에 자유롭게 애도를 하지도, 시신을 수습하지도 못했어요. 피해자들은 시간이 흘러 흘러 2011년부터 당시 군사법원 재판에 대한 재심을 청구했고, 2020년에는 민간인 희생자 1인에 대한 재심에서 처음으로 무죄가 선고되었어요. 이후 2021년 6월 ‘여수·순천 10·19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안’(여순사건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죠.
다음에는 이번 글에서도 등장한 '제주 4·3사건'을 알아볼게요. 최초의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불과 3주가 지나지 않아 제주 지역에서 선포된 비상계엄에는 어떤 배경이 있었을까요?
[팜팜이의 요점정리🥰]
- 비극의 시작: 여순사건의 배경과 전개
여순사건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막 출범한 혼란 속에서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한 일부 군인들의 봉기로 시작되었어요🌋 이들은 지역적 연대감과 민간인 초토화 작전에 대한 도덕적 거부감을 이유로 들었죠. 하지만 정부의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되며 사건은 더 큰 비극으로 이어졌어요. - 진압의 잔혹성: 피해와 후유증
진압군은 계엄령 아래 주민들을 소집해 부역자를 색출했고, 법적 절차 없이 즉결 처형이 이루어졌어요💔 민간인 희생자는 약 1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며, 유가족들은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 속에서 오랜 고통을 감내해야 했어요. - 현재의 과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희생자들의 명예 회복과 진실 규명은 계속되고 있어요🌿 2021년에는 ‘여순사건 특별법’이 통과되며 희망의 발판을 마련했지만,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는 많아요. 과거의 아픔을 딛고 더 정의롭고 화합하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해요.
[참고 자료]
45년 만의 비상 계엄⋯‘역대 17회 선포’ 계엄은 언제?
https://www.ms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5473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502800&code=kc_age_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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