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니커! 여전히 어지러운 하루하루예요🦔
쏟아지는 뉴스 덕분에 비상계엄이 무엇인지, 현재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등은 이미 빠삭~~하게🍞 알고 계실 거예요. 굳이 같은 내용 반복해서 뉴니커 여러분들의 소중한 시간을 낭비시키지는 않을게요! '팜팜이와 함께하는 대한민국의 계엄' 시리즈에서 우리나라에 선포된 주요 비상계엄과 이를 둘러싼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하나씩 알아봐요.
1948년 11월 17일 (46일간) | 제주 4·3사건 | 이승만 대통령
제주 4·3사건은 1947년부터 1954년까지 약 7년 반 동안 제주도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이에요. 경찰의 탄압에 저항해 무장봉기를 일으킨 남로당과 이를 진압하는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의 무력 충돌 속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되었죠.
💥 사건의 전개 1 - 3·1절 기념행사 중 총성이?
1947년 3월 1일, 제28주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가 열렸어요. 행사는 오후 2시쯤 마무리되었고, 군중들은 길거리로 나와 가두시위를 벌였죠. 해방된 지 1년 반밖에 안 된 상황에서 3·1절을 기념하는, 정말 즐겁고 뜻깊은 날이었겠죠? 🎉
그런데,,,
시위대 근처에서 한 어린아이가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치이는 사고가 발생했어요. 경찰이 사과했을까요? 아니요, 그냥 지나갔답니다. 이에 화가 난 군중들이 동전과 돈을 던지며 항의하기 시작했어요.
주변에 배치된 무장 경찰이 군중을 향해 총을 발포했어요. 그 결과 주민 6명이 희생되었고, 이로 인해 제주 사회는 크게 들끓기 시작했죠. 해방의 기쁨을 이제 막 누리던 한민족 내부에서 어떻게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던 걸까요?
🚩 사건의 전개 2 - 미국: 제주도는 '빨갱이 섬'이다!
1947년 3월 10일부터 제주에서는 민관 합동 총파업이 시작됐어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던 이 파업은 당시 제주 사회의 불만과 저항을 잘 보여줬죠. 하지만 미국은 이를 공산주의 반란으로 해석해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낙인찍었어요. 당시 '붉다'는 표현이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졌을지 짐작되시죠?
이후 제주로 외부 경찰과 극우 청년단체인 서북청년회 단원들이 들어왔어요. 이들은 우리나라가 분단의 위기에 봉착하고 있다는 명분으로(물론 맞는 말이긴 합니다만) 각종 행정기관을 장악하고 주민들을 억압하며 '빨갱이 사냥'에 나섰어요.
⚔️ 사건의 전개 3 -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의 무장봉기
이에 남로당이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남로당은 남조선로동당의 약자로 1946년에 창당된 좌익 정당이에요.
남로당은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항 저항과 단선(단독 선거) 및 단정(단독 정부) 반대를 기치로 350명 하여 정도의 인원이 무장봉기를 일으켰어요. 남로당은 좌익 정당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것도 있겠습니다만 경찰의 발포 사건 이후 정부를 향한 악화된 민심이 있었기에 더욱 힘이 실렸어요.
남로당의 제1목표는 단독 선거 반대였어요. 이는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해 실시된 첫 번째 국회의원 선거인데 사실상 한반도 분단의 시작점으로 여겨지고 있죠. 같은 해 9월 9일, 북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며 남북 분단이 확정되었어요.
🏞️ 사건의 전개 4 -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후 미군정과 무장대 간의 평화 협상이 잠시 이루어졌지만 결국 깨지고 말았어요. 무장대는 5·10 단독선거를 방해하며 소요 사태를 이어갔고 미군은 이를 계기로 제주도에 대한 강경 토벌작전을 본격화했답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수립된 뒤, 군 병력이 늘어났고 같은 해 10월 11일에는 제주도에 경비사령부가 설치되었어요. 이와 함께 해안선에서 5KM 이상 떨어진 내륙 지역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무조건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이 발표되었죠.
문제는 그곳이 원래 주민들이 살던 지역이라는 거예요.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던 주민들은 극심한 혼란과 고통에 시달렸답니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빨간색 지역이 바로 '적성 지대'로 해안선에서 5KM 지역에 해당해요. 이곳은 주민들에게 단순한 고향이 아니라 생존 기반이었던 곳이기도 했죠
🚨 사건의 전개 5 - 계엄령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어요. 하지만 '해안선으로부터 5KM'라는 조건조차 종종 무시되었고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누명만으로도 많은 주민들이 살해당했어요. 증거? 필요 없었어요. 단지 지목당했다는 이유만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었답니다.
학살은 군경토벌대만 저지른 게 아니었어요. 무장대 역시 해안 마을을 습격하며 경찰 가족과 우익 인사들을 살해했어요. 이 과정에서 무고한 주민들이 또다시 희생되었죠. 남로당의 무장 봉기와 이를 진압하려는 정부의 복수심이 끝없는 악순환을 낳았고 그 결과는 언제나 그렇듯 수많은 민간인의 희생으로 이어졌답니다.
계엄령이 해제된 이후에도 소란은 끝나지 않았어요. 1949년 3월, 정부는 "산에서 내려오면 살려준다"는 선무 작전을 펼쳤지만 내려온 이들은 수용소에 갇히고 말았죠. 이후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며 이들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또다시 학살당했어요.
특히, 모슬포 양곡 창고에 갇혀있던 250여 명이 총살당한 사건은 대표적인 예로 꼽혀요. 아래 사진은 이 비극이 일어난 섯알오름 학살터랍니다.
제주 4·3 사건은 무려 7년 7개월 동안 이어지며 대략 2만 5천 명에서 3만 명에 이르는 주민들이 희생되었어요. 이는 제주도 전체 주민의 약 10%에 해당하는 수치로 그 비극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죠🥀
중산간 마을(해발 100~300m의 내륙 지역)의 약 95% 이상이 불타 사라졌다고 해요. 주민들의 보금자리가 사실상 모두 없어졌다는 말과 다름없죠. 아래 사진은 미군 정찰기가 공중에서 촬영한 불타는 마을의 사진이에요.
🤔 제주도는 정말 빨갱이들의 섬이었을까?
태평양 전쟁이 끝난 뒤, 제주도는 철저히 재정비가 필요했어요. 주둔했던 7만여 명의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군사 시설이 파괴되었고 많은 제주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왔죠. 이런 혼란 속에서도 제주 사람들은 자주독립적인 국가를 꿈꾸며 전국적으로 조직된 건국준비위원회의 흐름에 따라 인민위원회를 결성했어요.
'인민위원회'라는 이름만 보고 좌익 세력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아요. 사실은 전혀 달라요! 인민위원회는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고, 마을 행정을 실질적으로 주도했고, 치안을 유지했고, 자치 교육을 실시했어요. 당시 미군정조차 인민위원회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어요:
미군정 당국 : 제주도인민위원회는“도내의 유일한 정당으로서, 모든 면에서 정부나 다를 바 없는 유일한 조직체”라고 평가하였다. (「자유신문」, 1946. 12. 19)
또한, 「동아일보」 시찰기에서는 이렇게 적혀 있어요:
“세간에서 제주는 좌익 일색이며 인위(人委)의 천하라는 말이 있으나, 제주의 인위는 건준 이래 양심적인 반일제 투쟁의 선봉이었던 지도층으로써 구성되어 있으며, 최근에 분립된 한독(韓獨), 독촉국민회(獨促國民會) 등의 우익단체와도 격렬한 대립이 없이 무난히 자주적으로 도내를 지도하고 있다.” (「동아일보」, 寶庫 제주도 시찰기, 1946. 12. 21)
제주 4·3 사건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인 사건인 만큼, 여러 예술 작품에서 이 사건을 다뤘어요. 문학, 미술, 영화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그 아픔과 상처를 담아내고 있답니다.
📖 한강 작가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제주 4·3 사건을 다룬 대표적인 문학 작품이에요. 작가 한강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나를 처음 알았다면 '제주 4·3' 다룬 '작별하지 않는다'부터 읽어 달라."
한강 작가는 제주 4·3 연구소의 자료와 증언록을 참고하며 사실적 고증에 심혈을 기울여 이 소설을 집필했어요. 소설 속 인물들의 이야기와 제주 4·3의 비극이 섬세하게 얽혀 있는 작품이에요.
🎨 강요배 화백의 4·3 미술제 작품들
강요배 화백은 제주 4·3 사건을 주제로 한 4·3미술제에서 수많은 작품을 선보였어요. 그의 작품들은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 숨겨진 비극을 강렬하게 담아냈고 역사적 아픔을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데 탁월했죠.
강요배 화백의 작품은 단순한 그림을 넘어, 제주 4·3사건을 기억하고 치유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평가받고 있어요.
다음 계엄령은 6·25 전쟁 때 선포되었어요. 사건이 사건인 만큼 무려 5번이나 선포되었죠.
[팜팜이의 요점정리🥰]
- 제주 4·3 사건의 비극과 규모
1947년부터 1954년까지 약 7년 7개월 동안 이어진 사건으로 경찰의 탄압과 남로당의 무장봉기, 정부의 강경 진압 과정에서 약 2만 5천~3만 명이 희생되었어요. 이는 제주도 전체 주민의 약 10%에 해당하는 수치로 중산간 마을의 약 95% 이상이 불타 없어지는 등 제주 사회 전반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죠. - 남로당과 정부의 대립
남로당은 경찰의 발포 사건과 정부의 탄압에 반발하며 5·10 단독선거 반대를 기치로 무장봉기를 일으켰고 정부는 이를 강경하게 토벌하며 민간인들까지 희생시키는 악순환을 초래했어요. 계엄령 아래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내륙'으로 들어가는 사람을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거나 수용소에 가두는 등 주민들은 생존의 터전을 잃고 극심한 고통을 겪었답니다. - 예술 작품 속 제주 4·3사건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사건의 아픔을 문학적으로 풀어낸 대표작으로 사실적 고증과 섬세한 서사가 돋보여요. 강요배 화백은 4·3 미술제를 통해 제주도의 풍경 속 비극을 담은 작품들을 남기며 사건의 기억과 치유를 위한 예술적 노력을 보여줬죠. 그의 작품은 단순한 그림을 넘어 역사적 공감과 치유의 메시지를 전달해요.
[참고 자료]
제주 4·3이란
https://jeju43peace.or.kr/kor/sub01_01_01.do
아이도, 여성도 예외 없이 ‘초토화’···70년 전 제주 땅에선 무슨 일이
https://www.khan.co.kr/article/201804021128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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